다음 시대의 자리 – 기술·자본·산업의 이동과 우리가 선점해야 할 기회
제1장
우리는 무엇을 잘못 보고 있는가
2022년 11월, 하나의 대화형 인공지능 서비스가 공개됐다.
출시 5일 만에 사용자는 100만 명을 넘어섰고, 두 달 만에 1억 명에 도달했다. 2025년에는 5억 명 이상, 2026년 초에는 주간 활성 사용자 수가 9억 명을 넘어섰다. 하나의 디지털 서비스가 이처럼 짧은 기간에 세계 인구의 상당 부분으로 확산된 사례는 이전의 기술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많은 사람은 이 사건을 ChatGPT의 성공으로 해석했다.
투자자는 AI 기업의 주가를 바라봤고, 기업은 사내에 생성형 AI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직장인은 보고서와 이메일을 작성하는 새로운 도구를 얻었고, 학생은 질문에 답해주는 개인 교사를 갖게 됐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지금 일어나는 변화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새로운 서비스 하나를 목격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의 지식과 판단을 생산하는 비용이 낮아지기 시작한 순간을 목격했다.
이 둘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첫 번째 해석에서는 AI가 하나의 새로운 산업이다. 두 번째 해석에서 AI는 경제와 산업, 과학과 국가의 작동 방식을 바꾸는 범용기술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바라봐야 할 기회도 달라진다.
AI를 하나의 산업으로 보면 모델 개발사, 반도체 기업과 소프트웨어 기업이 보인다. 그러나 AI를 새로운 생산체계로 보면 전력, 데이터센터, 통신망, 제조설비, 바이오, 로봇, 국방, 교육, 금융과 행정이 함께 보이기 시작한다.
이 책의 출발점은 바로 이 차이에 있다.
1. 사람들은 기술을 보지만, 역사는 비용의 변화를 기록한다
산업혁명을 증기기관의 발명으로만 이해하면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된다.
증기기관은 새로운 동력원이었지만, 산업혁명의 본질은 인간과 동물의 물리적 노동을 기계가 더 낮은 비용으로 반복 수행할 수 있게 된 데 있었다.
생산비용이 낮아지자 공장의 규모가 커졌다. 생산량이 증가하자 대규모 원료와 상품을 운송하기 위한 철도와 항만이 필요해졌다. 노동자가 공장 주변으로 이동하면서 도시가 성장했고, 대량생산된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유통과 금융이 발전했다.
하나의 기술이 다른 산업을 단순히 자극한 것이 아니다.
핵심 생산요소의 비용이 낮아지면서 경제 전체의 구조가 다시 설계된 것이다.
전기도 마찬가지였다.
전기는 더 밝은 조명을 제공한 기술에 그치지 않았다. 공장 안에서 동력을 배치하는 방식을 바꾸고, 생산설비의 위치와 운영시간을 바꾸며, 가정과 도시의 생활방식을 재설계했다.
인터넷 역시 정보를 전달하는 새로운 통신수단에 머물지 않았다.
정보를 복제하고 전달하는 한계비용을 사실상 0에 가깝게 낮추면서 미디어, 광고, 상거래, 금융, 교육과 소프트웨어 산업의 구조를 바꿨다. 음악과 뉴스, 소프트웨어와 지식은 물리적인 유통망에서 디지털 네트워크로 이동했다.
그렇다면 AI가 낮추는 비용은 무엇인가.
AI는 전기처럼 물리적 동력을 제공하지 않는다. 인터넷처럼 정보만 전달하는 것도 아니다.
AI는 정보를 읽고, 분류하고, 요약하고, 비교하고, 생성하며 일정 범위에서 판단하는 비용을 낮춘다.
다시 말해 AI가 영향을 미치는 대상은 인지 노동의 한계비용이다.
보고서 작성에 10시간이 필요했던 사람이 AI를 이용해 초안을 1시간 안에 만들 수 있다면, 단순히 9시간을 절약한 것이 아니다. 같은 사람이 더 많은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절약한 시간을 검토와 판단에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프로그래머가 반복적인 코드를 자동으로 생성하고, 의사가 의료영상을 더 빠르게 분석하며, 연구자가 수많은 논문과 후보물질을 좁힐 수 있다면 지식노동의 생산량과 구조가 동시에 달라진다.
이것이 AI를 단순한 소프트웨어 제품으로 보면 안 되는 이유다.
AI의 경제적 의미는 인간처럼 말하는 기계가 등장했다는 데 있지 않다. 지식과 판단을 생산하는 비용이 낮아지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2. 이번 변화는 왜 과거보다 빠른가
새로운 기술이 등장한다고 해서 곧바로 경제 전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전기와 자동차, 전화와 인터넷은 모두 사회 전체로 확산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발전소와 송전망, 도로와 주유소, 통신망과 컴퓨터처럼 새로운 물리적 인프라가 함께 구축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AI는 조건이 다르다.
AI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인터넷, 스마트폰, 클라우드, 디지털 결제, 소프트웨어 유통망과 전 세계적인 데이터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었다.
새로운 발전소나 철도를 먼저 건설하지 않아도 사용자는 기존의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통해 AI에 접근할 수 있었다. 기업 역시 별도의 대규모 설비를 직접 보유하지 않고 클라우드와 API를 통해 AI 기능을 도입할 수 있었다.
AI의 확산 속도가 빠른 것은 모델의 성능 때문만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디지털 인프라 위에 배포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24년 세계 생성형 AI 기업에 유입된 민간투자금은 339억 달러로, 2022년의 8.5배를 넘었다. AI를 사용하는 기업의 비중 역시 빠르게 증가했다. 자본과 기업의 도입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AI가 연구실의 기술에서 경제 인프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빠른 확산은 또 다른 문제를 만든다.
디지털 서비스는 빠르게 배포할 수 있지만, 그 서비스를 작동시키는 물리적 기반은 같은 속도로 늘어날 수 없다.
AI 모델을 학습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반도체, 데이터센터, 전력, 냉각, 네트워크와 대규모 자본이 필요하다. 소프트웨어의 수요는 몇 달 만에 폭증할 수 있지만 발전소와 송전망, 변압기와 데이터센터는 그렇게 빨리 건설할 수 없다.
따라서 AI 시대의 첫 번째 역설이 나타난다.
가장 비물질적으로 보이는 기술이 가장 물질적인 인프라를 요구한다.
3. AI 경쟁의 중심은 모델에서 기반시설로 이동한다
AI에 관한 대중적 관심은 주로 모델의 성능에 집중된다.
어떤 모델이 더 정확한가. 누가 더 많은 매개변수를 사용했는가. 누가 더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가.
그러나 AI가 실제 경제로 확산될수록 더 중요한 질문은 달라진다.
누가 모델을 만들었는가보다 누가 모델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가가 중요해진다.
국제에너지기구는 세계 데이터센터의 전력소비량이 2024년 약 460TWh에서 2030년 약 945TWh로 두 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오늘날 일본 전체의 전력 소비량보다 많은 규모다. 2024년부터 2030년까지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는 연평균 약 15% 증가해 다른 부문 전체의 전력수요 증가 속도보다 네 배 이상 빠를 것으로 예상된다. AI가 이러한 증가의 가장 중요한 동인이다.
AI 시대의 희소자원이 알고리즘에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모델이 개선될수록 더 많은 연산이 필요하고, 연산이 확대될수록 더 많은 반도체와 전력이 필요하다. 전력이 확보되더라도 데이터를 이동시키기 위한 네트워크와 열을 식히기 위한 냉각설비가 필요하다.
결국 AI 가치사슬은 다음과 같이 확장된다.
모델 → 반도체 → 메모리 → 첨단 패키징 → 서버 → 네트워크 → 데이터센터 → 냉각 → 전력 생산 → 송전망
이 가치사슬에서 어느 한 부분이라도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면 전체 성장이 제한된다.
여기서 투자자가 봐야 할 첫 번째 원칙이 나온다.
기술혁명의 수익은 가장 주목받는 기술에만 귀속되지 않는다. 그 기술의 확산을 제한하는 병목에도 귀속된다.
19세기 철도 붐에서 기회는 기관차 제조사에만 있지 않았다. 철강, 석탄, 토지, 금융과 물류가 함께 성장했다.
인터넷 시대의 승자 역시 인터넷 회선을 만든 기업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검색, 광고, 전자상거래, 결제, 클라우드와 스마트폰 운영체제가 더 큰 시장을 만들었다.
AI에서도 같은 구조가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초기에는 모델과 반도체가 가장 큰 관심을 받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전력과 냉각, 데이터 관리, 보안과 산업별 응용 프로그램으로 가치가 이동할 수 있다.
투자의 핵심은 AI라는 단어가 붙은 기업을 찾는 것이 아니다.
AI의 확산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하지만 공급을 빠르게 늘리기 어려운 자산을 찾는 것이다.
4. 생산성 향상은 자동으로 이익이 되지 않는다
AI가 기업의 생산성을 높일 것이라는 전망은 대체로 타당하다.
그러나 생산성이 향상된다고 해서 모든 기업의 이익이 동일하게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술이 널리 보급되면 그 기술 자체는 빠르게 평준화된다. 경쟁기업도 같은 도구를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기업이 비슷한 AI 모델을 사용할 수 있다면 모델을 사용한다는 사실만으로는 장기적인 경쟁우위를 만들기 어렵다.
차이는 모델 밖에서 만들어진다.
고객과의 관계, 독점적인 데이터, 유통망, 브랜드, 업무 프로세스, 규제 대응능력과 조직의 실행력이 AI와 결합될 때 경쟁우위가 형성된다.
예를 들어 두 보험회사가 동일한 AI 모델을 사용한다고 가정해보자.
한 회사는 기존의 업무 절차를 유지한 채 직원에게 AI 도구를 제공한다. 다른 회사는 계약 심사, 사고 접수, 위험 평가와 고객 응대를 데이터 중심으로 재설계한다.
첫 번째 기업은 일부 시간을 절약한다.
두 번째 기업은 보험금 심사 속도와 정확도, 고객 경험과 비용 구조를 동시에 바꿀 수 있다.
기술은 같지만 결과는 다르다.
따라서 기업의 AI 경쟁력은 구매한 모델의 성능보다 조직을 얼마나 다시 설계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여기서 두 번째 전략 원칙이 나온다.
범용기술은 모든 기업에 기회를 제공하지만, 그 기회를 이익으로 전환하는 능력은 기업마다 다르다.
AI의 수혜기업을 찾을 때도 이 차이를 구분해야 한다.
AI를 판매하는 기업, AI를 이용해 비용을 낮추는 기업, AI를 이용해 매출을 높이는 기업, AI의 확산에 필요한 인프라를 제공하는 기업은 전혀 다른 경제구조를 가진다.
투자자는 기술의 우수성만 볼 것이 아니라 다음을 확인해야 한다.
고객이 실제로 비용을 지불하는가.
AI 사용량이 증가할수록 이익률이 개선되는가, 아니면 연산비용도 함께 증가하는가.
기업이 보유한 데이터와 유통망은 경쟁자가 복제하기 어려운가.
AI가 없더라도 강한 기업인가, 아니면 AI라는 기대만으로 평가받고 있는가.
AI 시대에 가장 강한 기업은 반드시 가장 뛰어난 AI를 개발한 기업일 필요가 없다.
기존의 강한 사업구조 위에 AI를 결합해 생산성과 시장지배력을 함께 높이는 기업일 수도 있다.
5. 가장 큰 변화는 디지털 세계 밖에서 나타날 수 있다
AI를 소프트웨어 산업의 변화로만 해석하는 것도 위험하다.
AI가 문서를 작성하고 이미지를 생성하는 능력은 눈에 잘 보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더 큰 경제적 가치는 디지털 기술이 물리적 세계와 결합하는 지점에서 나올 수 있다.
생명과학에서는 AI가 단백질 구조와 신약 후보물질 탐색에 활용된다.
소재과학에서는 배터리, 반도체와 에너지 저장에 필요한 새로운 물질을 탐색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제조업에서는 설계, 품질검사, 예지정비와 로봇 제어에 적용된다.
에너지 산업에서는 전력수요 예측과 전력망 운영, 발전효율 개선에 활용될 수 있다.
이때 AI는 기존 업무를 빠르게 만드는 도구에 머물지 않는다.
과학적 발견과 물리적 생산의 속도를 높이는 기반이 된다.
과학기술의 진보는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새로운 배터리 소재는 전기차와 전력망을 바꾼다. 새로운 치료법은 의료산업과 보험, 고령화 사회의 비용구조를 바꾼다. 더 효율적인 에너지원은 제조업의 입지와 국가의 자원 의존도를 바꾼다.
따라서 AI 시대의 투자기회를 정보기술 기업 안에서만 찾는다면 변화의 절반을 놓치게 된다.
다음 시대의 중요한 기업은 겉으로는 AI 기업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신약을 개발하는 바이오기업, 공장을 자동화하는 로봇기업, 전력망을 안정화하는 에너지기업, 자율화된 물류를 제공하는 기업이 AI 발전의 더 큰 수혜자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서 세 번째 원칙이 나온다.
범용기술의 가장 큰 경제적 영향은 기술산업 내부가 아니라, 그 기술이 기존 산업의 비용과 가능성을 바꾸는 순간 나타난다.
6. 자본은 기술을 따라가지만, 결국 현금흐름으로 돌아온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자본은 먼저 가능성에 투자한다.
기술의 잠재력이 크고 시장 규모를 정확히 계산하기 어려울수록 기대는 커진다. 이 시기에는 매출과 이익보다 기술력, 사용자 증가율과 시장 선점 가능성이 더 중요하게 평가된다.
그러나 기술이 보급되기 시작하면 자본의 질문은 달라진다.
누가 실제 고객을 확보했는가.
누가 높은 비용을 감당하면서도 이익을 낼 수 있는가.
누가 경쟁자의 진입을 막을 수 있는가.
누가 지속적인 현금흐름을 만드는가.
AI에 대한 세계적인 투자도 이미 막대한 규모로 확대됐다. 2024년 생성형 AI 분야의 민간투자만 339억 달러에 달했다. 이는 기술의 가능성을 둘러싼 자본의 기대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높은 투자액은 산업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과거의 철도, 자동차, 인터넷과 재생에너지 산업에서도 시장 전체는 성장했지만 모든 기업이 살아남은 것은 아니었다.
기술의 방향을 맞히는 것과 투자 대상을 맞히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다.
인터넷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전망은 맞았다. 그러나 인터넷 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기업이 성공하지는 않았다.
전기차 시장이 성장한다는 전망도 맞을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전기차 제조사와 배터리 기업이 높은 수익을 얻는 것은 아니다.
AI 역시 같은 과정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AI 시대의 투자자는 세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첫째, 기술적으로 가능한 것.
둘째, 경제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것.
셋째, 현재 가격에서 투자 가치가 있는 것.
이 세 가지가 일치할 때도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가장 혁신적인 기술이 가장 좋은 사업모델을 갖는 것은 아니며, 가장 좋은 기업이 항상 가장 좋은 가격에 거래되는 것도 아니다.
투자의 기회는 미래를 알아맞히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미래의 변화가 기업의 매출과 비용, 경쟁우위와 현금흐름에 어떤 순서로 반영되는지를 이해하는 데서 나온다.
7. AI는 경제기술인 동시에 국가기술이다
산업혁명 이후 강대국의 조건은 생산능력과 연결돼 있었다.
철강, 조선, 화학, 자동차와 에너지 산업은 경제성장의 기반이었고 동시에 국가의 군사력과 외교력을 뒷받침했다.
AI 시대에도 기술과 국력의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직접적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AI 모델은 민간의 생산성과 서비스에 활용되지만 정보분석, 사이버방어, 무인체계, 물류, 정찰과 군사적 의사결정에도 활용될 수 있다.
반도체는 소비자 전자제품에 사용되지만 통신, 무기체계, 위성, 산업설비와 국가의 핵심 인프라에도 필요하다.
클라우드는 기업의 정보시스템인 동시에 행정과 금융, 통신과 국방을 지탱하는 기반이 된다.
따라서 다음 시대의 국가 경쟁력은 병력과 무기의 숫자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연산자원, 반도체 생산능력, 전력망, 데이터센터, 통신위성, 소프트웨어, 사이버보안, 기술인재와 자본시장이 하나의 전략체계를 형성한다.
과거에는 국가가 군사기술을 개발하고 민간으로 이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음 시대에는 민간기업이 먼저 개발한 AI, 클라우드, 위성, 드론과 소프트웨어 기술을 국가가 국방과 안보체계에 결합하는 흐름이 더 중요해질 수 있다.
이것은 기업이 국가를 대체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보다 정확한 변화는 다음과 같다.
국가는 여전히 법률과 조세, 외교와 군사력을 보유하지만, 그 힘을 효과적으로 행사하기 위해 민간의 기술과 인프라에 더 크게 의존하게 된다.
국가 경쟁의 단위도 달라진다.
기업 대 기업, 국가 대 국가의 단순한 경쟁이 아니다.
국가, 기업, 대학, 연구소, 자본시장과 인재가 얼마나 빠르게 연결되는가를 둘러싼 생태계 대 생태계의 경쟁이 된다.
이 관점에서 국력은 기술을 보유하는 능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기술을 기업으로 이전하고, 기업을 산업으로 성장시키며, 산업을 공급망과 외교력, 안보역량으로 전환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8. 한국은 모든 것을 만들 수 없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을 만들 수 있다
AI 시대의 국가전략을 완전한 기술 자립으로 이해하면 현실적인 전략을 만들기 어렵다.
첨단 반도체, AI 모델, 클라우드, 에너지, 로봇, 바이오, 우주와 양자기술을 한 국가가 모두 독자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보유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기술 생태계가 자국을 제외하고는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운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다.
한국은 이미 반도체 메모리, 제조업, 배터리, 통신, 조선, 원전과 방위산업에서 의미 있는 기반을 갖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강점이 미래에도 자동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AI 연산과 연결되는 고대역폭 메모리와 첨단 패키징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배터리를 생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소재, 에너지저장장치와 전력망으로 확장해야 한다.
조선업은 선박 제조를 넘어 자율운항, 해양데이터와 무인체계로 이동해야 한다.
원전산업은 발전소 건설만이 아니라 AI 데이터센터 시대의 안정적인 전력 공급전략과 연결될 수 있다.
국가의 전략은 유망산업 목록을 정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기존 산업의 강점을 AI와 결합해 세계 공급망에서 대체하기 어려운 위치로 전환해야 한다.
한국이 추구해야 할 것은 모든 기술에서의 독립이 아니라, 동맹과 세계 산업질서 안에서의 필수성이다.
9.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하는가
AI 시대의 핵심 질문은 AI가 얼마나 똑똑해질 것인가가 아니다.
AI가 경제의 어떤 비용을 낮추고, 그 결과 어떤 산업이 재편되며, 그 과정에서 어떤 자원이 희소해지는가가 더 중요하다.
이 구조를 이해하면 국가와 기업, 투자자와 개인의 선택도 달라진다.
국가의 자리
국가는 연구개발 투자액만 늘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기술이 산업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전력, 데이터센터, 반도체, 자본시장, 인재와 규제를 하나의 전략으로 묶어야 한다.
또한 모든 분야에서 경쟁하기보다 세계가 대체하기 어려운 몇 개의 핵심 영역을 선택해야 한다.
기업의 자리
기업은 AI 제품을 구매하는 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자신의 비용구조와 업무절차, 고객경험과 사업모델을 AI에 맞게 다시 설계해야 한다.
AI를 도입한 기업보다 AI를 이용해 조직 전체를 재설계한 기업이 더 큰 경쟁우위를 갖게 될 가능성이 높다.
투자자의 자리
투자자는 가장 화려한 기술보다 그 기술의 확산에 필수적인 병목을 찾아야 한다.
반도체뿐 아니라 전력, 냉각, 네트워크, 데이터, 보안, 로봇, 소재와 산업별 응용시장을 함께 봐야 한다.
동시에 기술의 성장과 기업의 수익성, 기업의 가치와 투자 가격을 분리해서 판단해야 한다.
개인의 자리
개인은 AI와 경쟁하는 방법을 찾기보다 AI를 이용해 더 높은 수준의 판단을 수행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식을 암기하는 능력보다 문제를 정의하고, 서로 다른 분야를 연결하며, AI가 제시한 결과를 검증하고 책임지는 능력이 중요해질 것이다.
기술만 아는 사람보다 기술이 경제와 산업, 국가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더 희소해질 수 있다.
결론
다음 시대의 기회는 기술이 아니라 구조에 있다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그 기술의 이름을 기억한다.
증기기관, 전기, 자동차, 인터넷, 스마트폰과 AI.
그러나 역사를 실제로 바꾼 것은 기술의 이름이 아니었다.
기술이 핵심 생산요소의 비용을 낮추고, 비용의 변화가 산업구조를 바꾸며, 산업구조의 변화가 자본과 노동, 도시와 국가의 질서를 이동시킨 과정이었다.
AI도 같은 경로를 따라가고 있다.
다만 이번에는 속도가 훨씬 빠르고, 영향의 범위가 더 넓으며, 디지털과 물리적 세계가 동시에 연결되고 있다.
이 변화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AI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일이 아니다.
AI가 무엇을 저렴하게 만들고, 무엇을 더 많이 필요로 하며, 어떤 새로운 병목과 가치사슬을 만드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 구조를 이해한 사람은 단순히 AI 기업을 찾지 않는다.
전력과 반도체, 로봇과 바이오, 제조업과 국방, 교육과 금융이 AI를 통해 어떻게 다시 연결되는지를 본다.
그리고 그 연결 속에서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위치를 찾는다.
다음 시대의 승자는 가장 뛰어난 AI를 먼저 사용한 사람이 아닐 수 있다. AI가 바꿀 경제와 산업, 과학과 국가의 구조를 먼저 이해하고, 그 구조 속에 대체하기 어려운 자리를 만든 사람이 새로운 시대의 중심에 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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